쟁점한국사 강의 필기 개괄 - 식민사관부터 박정희 경제개발까지
[seminar] 7 min read
KAIST HSS399.02 쟁점한국사 수업 (배석만 교수님) 필기 개괄 (2018학년도)
2. 사관 (史觀)
2-1. 식민사관
일제가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역사관. 서양우월주의의 변형이기도 하다.
일선동조론 (内鮮一体, 강조 시기: 1940년대)
- 목적: 전쟁에 민간인까지 동원할 명분(“같은 조상, 같은 민족”).
- 일본 태양신과 단군을 연결. 이전까지는 주나라인 기자에만 관심(소중화 의식).
만선사관
- “만주와 한국의 역사는 하나다.” 자주적 역사가 없으므로 일본 합병에 저항할 이유가 없다.
- 강조 시기: 1920년대 문화통치기.
- 목적: 저항의식과 사상적 기반 제거.
타율성론
- 중국에 종속된 역사 강조. 조선은 스스로 단군신화를 부정했다.
- 위(중국, 기자·한사군)와 아래(일본)에 통치받았다는 논리.
정체성론
- “한국 역사에는 자체적인 발전이 없었다.”
- 반박: 백남운은 사적유물론으로 씨족 공산제 → 노예제 → 농노제 → 봉건제의 일련 발전 과정을 주장.
광개토대왕릉비 논란 비문의 핵심 구절:
- 1줄: 백제·신라가 과거에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해왔다.
- 2줄: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ㅇㅇ(가야 추정)·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 →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용도로 활용.
Q3. 식민사관 극복이 왜 그토록 오랜 과제였나? 식민사관은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었다.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은 연계될 때 위력이 세진다. 또한 따지고 보면 식민사관도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론’과 맥락이 닿는 근대화론의 변형이다.
Q4. 대종교 신봉자들이 독립운동에 나선 이유? 일본의 일선동조론에 저항하는 사상적 기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2. 민족사관
우리 민족의 자율성과 자주성에 역사의 주안을 둔다. 우수성뿐 아니라 외세에 종속되지 않은 자율적 역사를 강조한다.
Q2. 민족사관이 양날의 검인 이유? 히틀러, 북한처럼 민족주의가 극단화되면 배타성과 폭력성으로 변질된다.
- 자료 부족한 고대사에서는 방법론적 사관이 실증사관을 이기는 경향이 있다.
- 한국 민족사관이 지나친 방향으로 흐른 데 대한 자체 반성도 존재한다.
4. 발해
왜란 후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이 증가하며 실학이 탄생했다. 실학자들은 발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 유득공: ‘남북국시대’ 제시(남국 통일신라 / 북국 발해) → 자주적 역사 강조.
- 이익: 고구려 영토를 차지한 침략자로 발해를 부정적으로 봄.
- 고려 태조 왕건: 훈요 10조에서 발해를 ‘적국’으로 언급. 서경 천도를 위한 배경이 필요해 발해 역사를 조사했다.
Q7. 왜 일제시기에야 발해를 적극적으로 한국사에 포함하기 시작했나?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좋은 역사적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에 버금가는 대국 발해는 “우리도 큰 영토를 가졌고 충분한 발전이 가능했다"는 논거가 된다. 1970년대에는 ‘자주’라는 단어와 함께 7·4 남북통일성명의 맥락에서도 강조되었다.
6. 근대화 논쟁
자주적 근대화는 실패했다. 일본은 성공했으며, 이를 우익의 자랑거리로 삼는다.
6-1. 근대화론
서양의 발전이론이 전 세계로 확산된 이론.
- 마르크스 사회 5단계 발전론: 원시 공동체 → 고대 노예제 → 중세 농노제 → 근대 자본주의 → 사회주의.
- 사회진화론: 한국이 덜 발전했으므로 더 발전해야 한다는 논리.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 서세동점: 서구가 동양을 점령하며 근대화를 강제.
구조주의 이론의 저항
- 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도약한 국가는 후발국가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찬다.
- 종속이론: 선진국의 산업구조에 묶인 후진국은 선진국이 죽이면 죽는다.
- 세계체제론: 중심국가들의 교류가 세계질서를 결정한다.
6-2. 내발론 (조선 자생적 근대화론)
조선 내부에서 이미 근대화의 싹이 트고 있었다는 주장.
- 이양법 (모내기): 쌀 생산량 증가 → 상품 작물 재배 → 상업 활성화 → 경영형 부농·광작 체제(농장형 공장 체제).
- 조세 금납화: 현물 대신 돈으로 납부 → 점차 근대적 화폐경제로.
- 금난전권 폐지: 시전 외 행상(난전) 설립 가능 → 상인 증가.
- 민영수공업: 규모가 커지면 공장과 다름없다.
- 북학파 (박제가): 상공업 중시, 자본주의적 사조.
- 정치의 근대화: 입헌 → 탕평 → 상소(사간원 등) = 현대 국회의 견제 역할.
내발론의 한계
- 상업은 고대부터 있었고, 상인이 땅을 사서 지주가 되는 건 근대로의 발전이 아니다.
- 각 사건의 연속성이 없다. 실학-개화파의 연결은 매우 어설프다. 박지원(국학파)의 손자 박규수가 개화파 요직에 오른 것이 유일한 연결고리인데, 그마저도 평양감사로 있다가 셔먼호를 불태우고 끝난 격이다.
6-3. 내인론: 흥선대원군과 근대화
내부에서 조선 망국의 원인을 찾는 시각.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세도정치 근간인 서원을 철폐하고 경복궁을 정비해 왕권을 강화했다.
Q10. 흥선군은 왜 백성을 안정시킬 세력을 키우지 못했나? 그의 머릿속에는 백성 대신 봉건적 왕권 강화가 있었다. 결국 동상이몽이었다.
Q11. 흥선군은 왜 쇄국했나? 서양은 물건을 꾸준히 찍어내므로 교역하면 우리가 진다. 내부에서 준비하자는 논리였다. 셔먼호 엔진 해부를 지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내정에서 실패해 지지를 잃었다.
고종은 ‘문을 열겠다’는 프레임으로 아버지를 이기고 개화파를 등용했지만, 이 역시 근대화가 아닌 또 다른 왕권 강화였다.
개화기 전개
- 일본의 강화도 조약 → 청일전쟁 → 김옥균의 갑신정변 실패(청군 때문에 즉시 군대 투입 불가) → 식민지화에 10년 소요.
- 명성황후 시해 →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망명 → 러일전쟁.
- 광무개혁: 고종의 마지막 시도. 각종 이권(금광채굴권·철도부설권) 매각으로 재원 마련. 그러나 서툴고 너무 늦었다.
- 온건개화의 갑오개혁: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긴 후 견제 세력 없이 일본 주도로 진행.
위정척사파의 역할 양반 수구세력 위정척사파는 반외세·항일에 가장 강력했다. 척왜양이는 동학의 구호이기도 했고, 의병을 처음 조직한 건 유인석 같은 양반이었다. 독립군의 원류가 된다.
자주적 근대화는 결국 주권 수호라는 면에서 수구파가 공헌하게 된다. 한계는 봉건적 체제였다: 양반 의병장이 평민 의병을 사형시키는 모순이 있었다.
동학농민운동
- 1차 봉기: 사또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 → 봉건제에 저항, 민주주의 지향의 근대성.
- 2차 봉기: 청일전쟁 외세에 반대 → 반외세.
- 결론: 두 세력 모두 반외세에 노력했지만, 근대국가 건설에 대한 비전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8. 독립운동과 좌우 분열
좌우합작이 안 됐다는 것이 독립운동의 가장 큰 문제다. 합심해서 정부를 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조선에서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에 ‘이용’하자고 시작되었다. 영국·미국이 일본의 러시아 남하를 환영했으므로, 현실적으로 편을 들어줄 세력이 소련과 중국 공산당뿐이었다.
자유시 참변: 청산리 전투 후 일본 보복을 피해 소련 지원을 믿고 북상했지만, 소련은 기대에 못 미쳤고, 독립군 내분 끝에 무장세력이 약화되었다.
소련·중국 공산당의 지원: 무장세력은 팔로군의 일원으로, 김일성 부대는 소련 부대 내에 편입.
코민테른의 우익 결별 지시 → 좌익 독립운동가들이 따름.
1930년대: 민족혁명당과 임시정부
- 일본의 대륙 침략 본격화 + 중국의 국공합작 → 한국 내 좌우합작 필요성 대두.
- 통일 동맹 결성 → 민족혁명당 창당(유일당). 단, 임시정부 세력이 마지막에 비토.
- 김원봉(좌파 주도권)과 김구가 협상 → 김구는 비참여 세력 규합 → 임시정부 내 한국국민당 창당.
- 중일전쟁 후 40년대에 김원봉-김구 합작 →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원봉은 총사령관 격 수락.
- 단, 김일성 등 공산당 무장세력(중국 팔로군)은 미포함.
- 광복군 편성, OSS 훈련 중 → 해방.
- 프랑스는 자유프랑스군으로 연합국 일원이 되었지만, 한국은 인정받지 못하고 미·소가 편의에 따라 38선을 그었다.
10. 미군정과 미국 원조
미국과의 관계
기존 반미:
- 남북분단 주범.
- 원조에서 자국 이익 추구(잉여농산물 강제 증여).
- 중일전쟁 7년 외에는 미일 밀월관계. 동북아 중심국가로 일본 선택.
신반미:
- 5·18 당시 계엄군 파견은 미군 허락이 필요했다. 해명 없음.
- 한미상호방위조약상 당시 평시·전시 모두 작전권이 미국에 있었다. 작전권 없이 군대를 이동하면 쿠데타·반역죄.
한국은 미국을 짝사랑하는 나라다. 신미양요로 좋지 않게 만났지만 일본 다음으로 수교,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나라다. 미국이 관심을 가진 건 해방 이후, 태평양전쟁 후 아시아 기지가 필요해지면서부터다. 주한미군이 지금까지 있는 건 사실 중국 견제 때문이다.
미군정의 공과
공: ①일제 전시체제 해제(사상범예방구금법·치안유지법 폐지). ②통일국가 수립 노선 지지(좌파 중도파 중심 정권 수립 시도를 지원).
과: 현상 유지 선호. 친일파 청산 실패. 우익의 힘이 약하므로 친일파를 의도적으로 육성했다.
원조의 구조
원조 흐름: 쌀 원조 → 경제재건원조(기계) → 전쟁 긴급원조 → 전후 재건 원조. 별도의 잉여농산물 원조.
대충자금(counterpart money): 매년 예산안을 미국에 제출 → 미국 의회 승인 → 한미 합동경제위원회 흥정 → 미국 기업 우선 발주 → 물품 도착 후 한국 정부가 구매 → 재화 발생 = 대충자금.
이 구조에서 기업은 시장조사 대신 정부에 뇌물(사과 상자)을 가져가야 했다. 정경유착의 발생 배경이다.
대충자금은 국방비에 다수 사용되었고, 일부만 경제사업에. 포항제철은 미국 원조가 아닌 일본 청구권 자금으로 지었다. 제1 용광로에는 일본 엔지니어(신일본제철) 이름이 붙어있다.
원조의 부작용:
- 국내 면화 농업 타격.
- 삼백산업(제분·제당·제면) 편중.
- 불균등발전: 원자재를 시장보다 싸게 들여와 되파는 산업만 성장.
이승만의 공: 한미상호방위조약. 미군의 전후 주둔 및 전장 즉시 개입을 보장. 북진통일론과 포로 중간 석방 등으로 미국을 압박해 체결을 끌어냈다.
12. 박정희 경제개발
쿠데타의 구조
박정희: 사범대 → 일본군 입대(혈서 논란). 박상희(형) 여순반란 연루 후 숙청, 불명예제대 → 6·25 → 별 2개.
“이제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면 안 된다” → 쿠데타.
핵심 논리:
- 정상적 민주절차로 집권한 것처럼 만들어야 함. “민주당이 싸우고 사회는 데모고 경제도 망했다. 구국의 뜻을 가진 장교들이 한다.” 육사 8기 중심. 이미 장면 정부도 깡패 처단·부정축재처리법·경제민주화 등 개혁을 시작했었지만, 군의 요구를 무시했다.
- 친일 프레임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어느 정도 감출 수 있다. 하지만 김일성에 비해 항일 이력에서 열등감이 있었다(김일성 가짜설 유포). 핵심 문제는 본인이 좌익 군인(남로당 계열)이었다는 것. → 혁명공약에 반공 국시,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은 아직도 미완성 규명.
- 미국의 의심(좌익인가?) → 대통령 이전 군인 신분으로 미국 방문해 증명. 먼저 꺼낸 카드가 베트남 파병 가능하다는 제안.
경제개발은 박정희 덕분인가?
박정희 아니었어도 됐을 것이라는 근거:
- 이승만 시기부터 원조로 토대 형성.
- 장면 정부도 5개년 계획 있었음. 이승만도 1958년에 5개년 계획 수립. 독창적이지 않음.
- 국민이 근면하게 노력한 결과.
- 냉전 호황: 공산 진영 대비 선전마을이 되어야 하므로 미국이 조악한 물품도 많이 사줬다. 이런 한국처럼 된 나라가 지금은 없다.
현재로는 독재자냐 지도자냐의 평가가 병존한다.
경제성장의 틀
- 수입대체: 일본에서 기계 수입해 설탕·제품 생산. 이병철의 시작.
- 내포적 공업화: 원조자금 부족 → 국내에서 돈 짜내기. 농가 고리채 탕감(소득주도 성장의 원시 버전) → 소비 증가 기대. 하지만 자금 부족으로 실패.
- 화폐개혁: 집에 숨겨둔 돈 끌어내기 시도. 하지만 제조업 중소기업이 버티지 못해 실패.
- 수출: 달러 확보. 가발·가마니·쥐가죽·장어가죽 등 모두 팔다가 선박·철강 등 고부가가치 수출로.
- 경제기획원 설치: 기존 기획처가 재무부와 싸워야 했던 구조에서, 부총리급 경제기획원을 신설해 재무부보다 위에 위치.
- 대기업 상사 설립: 미쓰이 물산 벤치마킹. 현재 삼성물산이 이 계보.
- 8·3 사채동결 조치: 기업 부채 5년 동결 → 기업 자금사정 개선 → 대기업 그룹체제 탄생의 발판.
부작용: 정경유착, 내수시장 소홀, 80년대 과잉 투자 후 구조조정 필요.
80년대 강압적 구조조정(“현대, 너희는 큰 엔진만 만들어”) → 이후 국가개입 축소·민간 경제로의 전환. 경제민주화는 아직 진행 중.
결론
쟁점한국사의 핵심은 각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편적 암기가 아니라, 식민사관 극복 → 근대화 논쟁 → 독립운동 분열 → 해방 후 국가 건설의 좌절 → 개발독재와 경제성장이라는 흐름 안에서 각 행위자의 논리와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