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한국사 강의 필기 원문 (주차별)
[seminar] 23 min read
KAIST HSS399.02 쟁점한국사 수업 원문 필기 (2018학년도)
첫째 주
화요일: 시대 구분
시대 구분은 기본적으로 발전의 역사. 한국이 집착해야 하는 이유 식민사관. Q1 현대는 있는가? A1 편의에 의한 구분. 아직 자본주의 사회인 근대에 살고 있음.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
【비교】 서양의 시대 구분 사회 (중앙집권적 고대 -> 분권 중세 -> 강력한 왕조가 등장하는 근대). 근세: 아시아를 위한 불행한 끼워 맞추기 (자본주의는 있으나 근대는 아닌). 한국의 중세의 한계: 돈을 번 지주가 땅을 더 사지, 공장을 짓진 않는다 (근대로 못 감). 동양의 시대 구분 국가체제 정비 (왕조의 완성도) 한편 PPT 오른쪽 (인도 미국 원주민 남미 원주민 아프리카)에선 장기 정체의 역사. 시대를 나누는 게 의미가 있나.
마르크스 시대 구분을 만든 사람 (고대 중세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문제가 있다. 미해결인 근대의 문제들…. 현 정권도 열심히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들. 공산주의로 문제를 풀어야 하나? 동기가 있어야 일한다는 간단한 논리 무시해 망함.
서양 우월주의 블랙팬서 부산 자갈치시장 그렇게 안 어두운데 왜 그렇게 나왔을까. 생각해보면 제국주의와 식민 사관엔 지배를 합리화하는 역사관 (가치관)이 있다. 조선놈들은 안돼 단결도 안 되고 나눠서 싸우고….
TMI : 강사(교수)님 수업료 시간당 7만 원…. 부럽다
수요일: 민족사관
민족사관 우리 민족이라는 데 역사의 주안을 둔다. 우수성뿐만 아니라, 식민 되지 않은 자율성을 토대로 -> 되게 어렵네….
고대사에는 자료가 부족하므로 방법론적 역사관이 의견을 먹어버린다. “왜 고조선이 요동에 있냐?” “그럼 왜 없냐? 식민사관이냐?” Q2 민족사관이 양날의 검인 이유 A2 히틀러, 북한 등
목요일: 식민사관, 광개토대왕릉비, 삼국통일
식민사관의 극복은 한국사관의 오랜 과제지만 너무 민족사관 쪽으로 간 거 아니냐에 대한 반성도 있었음. Q3 왜 그렇게 오랜 과제였나? A3 식민사관은 매우 정교했다.
일선 동조론 (내선일체)가 가장 강조된 게 40년대. 전쟁에 민간인까지 모두 참여할 명분 (같은 조상 같은 민족). 일본 태양신과 엮인 게 단군, 그 전까진 주나라인 기자에나 관심이 많았지 (명이 망하고 소중화로서의 긍지) Q4 대종교 나철 등 왜 대종교 신봉자가 독립운동을 했을까? A4 일본의 이런 논리에 저항하는 사상적 기반
만선사관 만주와 역사가 하나. 우리는 자주적 역사가 없으므로 일본합병에 저항할 이유가 없다. 저항의식(과 그 사상적 기반: 우리는 외세에 종속되지 않고 침략에도 불구하고 자주적 역사를 지녔다)을 없애기. 가장 강조된 게 20년대. 3.1운동 이후 문화통치의 목적은 친일파 육성. 일본은 열심히 한국사를 연구함. 광해군의 외교 전술에 주목한 것도 일본 사학자 (광해군의 실용노선 실패하고 중국과의 의리만 생각하는 명분파만 득세해 자연스레 망했다)
타율성론과 단군신화 중국에 복종하는 타율성론. 조선은 스스로 단군신화를 부정했다.
정체성론 자신의 발전이 없었다. 이에 백남운 (북한 간 사람)은 사적유물론을 받아들여서 고대사회부터 계속해서 노예제 상태로 정체되었다? 는 의견에 반박하고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씨족 공산제, 노예제, 농노제, 봉건제의 일련 과정을 쭉 거쳐서 발전했다고 주장함.
광개토대왕릉비의 논란 비문 : 백잔 (백제 잔당, 즉 백제 괴뢰 나쁜 놈들) 1줄 백제와 신라는 과거에 (고구려의) 속국 백성으로 조공을 해왔다. (유래 조공) 2줄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깨뜨렸다 (파) 무엇을, 백잔 ㅇㅇ (가야로 추정) 신라를, 그리고 신민으로 삼았다 (위) ->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왕후의 임나일본부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뒷받침 ->위는 중국 (기자) 아래는 일본이 통치. 즉 식민사관의 주장은, 한민족은 이때만 발전했고 그 뒤로는 정체됐다. 이때 그나마 고대로 발전했던 거다. ∴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은 한 몸. 연계될 때 위력이 세다.
삼국의 상황. 우리와 가장 가까웠던 민족이 말갈. 발해의 말갈족, 고구려와 연합해 당을 치던 말갈, 이후 만주족으로 개명해 청나라를 세우는 등. 연개소문 -> 박정희? 국토개발 (요동 천리장성) 쪽에서 일하다가 자신이 바지 왕을 세우고 스스로 만든 대막리지가 되어. 중국이 백제를 치기 위한 상륙작전. 부여로 바로 올라가서 평제(백제 평정) 탑으로 (정림사지 삼 층) 15만 (중국 전력) 군사를 몰고 옴. 힘들었던 이유. 뻘이었고, 배 만들기 힘듦. Q5 당은 왜 이걸 감행했을까? A5 절치부심으로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중국은 나당 동맹부터 체결 (648년, 당 태종 죽기 1년 전. 과연 유언으로 ‘고구려를 치지 말라’ 고 했을까. 아닐 것이다).
의자왕의 기본적 실수 고구려와 손을 잡지 않았다. 사실상 당나라가 고구려를 점령하게 놔둠, 신라 왕을 계림도독으로 임명했다는 점에서 만주족 황제 푸위를 만주국 황제로 임명한 것과 같이 굴욕적인 동맹을 맺음. 형식적으로 몇 년간 중국의 식민지를 자진함. Q6 신라가 왜 삼국통일을 염원했을까? A6 대동강 이남의 통일, 한민족의 발현
국호 대한민국의 민족 정체성 한은 대동강 이남 삼한이나 위만조선? 의 한왕에서 왔다. 즉 남쪽의 정체성인 것, 반면 북조선의 조선은 암만 낮게 잡아도 평양 정도. 통일했을 때 국호 분쟁이 있을 것. -> 이걸 이해했으면 수업이해도가 높음
고구려의 영토가 중요한 게 아니고 (고대는 영토가 중요하지 않다 진짜 최근에 와야, 알래스카 판 시대 이후에 와야), 국토가 좁아졌다는 의미로 한정된 통일이라는 게 아니고 고구려의 역사가 우리 역사인지 희미해짐 (중국사에 고구려 유민을 이주시켰다고 씀, 고전적인 정체성 말살 방법, 대장군 고선지가 고구려 유민) 발해는? 애초에 고구려 땅에 세웠으니 고구려 후예를 자처하고, 기와 문양 같은 건 당연히 닮는 거 아니겠는가… 중국 역사학자들에게 할 얘기가 많이 없다…. 장기적 역사를 생각할 때 외세의 힘을 빌린 것에서 그 후유증으로 식민지가 된 것도 문제지만 고구려를 뺏겨서 그 역사를 주장할 수 없게 된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
TMI : 광해군 -> 영화 남한산성 보기?
TMI : 서술할 때는 끝에 핵심 키워드를 꼭 써주기
둘째 주
월요일 (택민): 발해에 대한 시대적 분석
실학에서 발해란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 증가 -> 실학 탄생 (ex. 정약용(목민심서), 유득공(역사에 관심), 이익).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이 처음으로 ‘남북국시대’라는 단어 제시 (남국 – 통일 신라 / 북국 - 발해) => 자주적인 역사.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에게 발해는 고조선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한 침략자 => 고조선고구려를 적극적으로 긍정적 생각, 그러나 발해는 X.
고려에 발해란 ‘적국’의 개념 (고려 태조 왕건의 십계명(훈요 10조)의 ‘북진’ 언급). 적국(발해)에 대한 역사를 조사했던 이유 : 서경 천도를 위한 배경이 필요해짐.
Q7 왜 일제시기에 와서야 발해를 적극적으로 한국사에 포함할까? A7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한 좋은 방법 (고구려 다음으로 큰 국가, 대조영 등) -> 우리나라도 큰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충분한 발전이 가능해 왔다. 1970년대 ‘자주’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 증가, 7.4 남북통일성명
수요일 (택민):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인조의 반금친명 정책
임진왜란으로 인한 인조의 도피, 나라의 혼란 -> 후에 분조(일정의 권력 분리)를 통해 위와 비슷한 사태 때 해결하려고 함. 한편 금(후에 청으로 발전)의 압박 + 명나라의 재조지은(나라를 멸망할 뻔한 것은 구원한 은혜) -> 조선 내에 대립 발생. 광해군 중립외교, 명분의리보다 현실실익을 추구함 (북인 정권 – 정인홍, 이덕형 등) 인조 반금친명 외교 -> 인조반정(최명길), 서인 정권 + 반인조세력의 난(그러나 금방 진압됨) -> 두 차례의 호란에 굴복.
훈구-사림 갈등 (사화 참고) -> 이것이 후에 여러 분파로 나뉘면서 정치적 대립이 지속하여왔다. Q8 과연 인조는 반금친명 외교를 진행하면 청나라가 쳐들어올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A8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결과와 굴욕이 치욕스러울 줄은 몰랐던 것이지 Q9 그럼 알면서도 이렇게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A9 서인 정권 당시 단점을 보완해가며 발전하지 못했다. 친명파가 많았다(오늘날 친미 등을 생각하면 편하다.).
TMI : 훈구-사림 같은 여러 붕당 사이의 갈등 등을 아는 것이 중요
셋째 주
월요일: ‘근대화론’ 조선 사회를 안정된 사회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체?
자주적 근대화는 실패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 한편 일본은 ‘자주적’ 근대화에 자부심. 우익의 자랑거리.
서양 합리적 시간 절약적 사고는 서양의 이야기. 베버를 필두로 서양의 사회사상가들 ‘근대화이론’, 발전이론을 도식화한 마르크스의 사회 5단계 발전론 : 원시 공동체 > 고대 노예제 > 중세 농노제 > 근대 자본주의 > 사회주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사회의 기득계층이 교황 종교인에서 부르주아지 (경제인, 기업가)로.
사회진화론 한국이 덜 발전했으므로 이제 더 가야 한다는 이론. 대표적 인물, 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춘원 이광수, ‘사회진화론’ 에 입각해 쓴 “민족개조론” 동아일보
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의 이론. 도약한 국가는 사다리를 걷어찬다.
종속이론 선진국에 산업으로 묶여 있는 후진국. 선진국이 죽이려면 얼마든지 가능
세계체제론 중심국가가 따로 있고 이들의 교류가 세계질서
비인간적 가치관 정이 심각해져 이해의 요구 심각화, 관행 정착 (퇴근을 정시에 하는 걸 고까워하는 정서)
국익에 따른 ‘4500만 국민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절대 선이 될 수 있는가. 일단 근대는 국가 단위의 사회이므로 이를 긍정한다. 일본 “우리를 위해 고래를 잡는다”
내발론의 각종 용어는 고등학교 때 배웠을 것. 이양법 모내기 덕분에 쌀 생산량도 늘고 상품 작물까지 재배하게 되면서 조선에서는 상업의 기운이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조선 후기 이앙법의 보급은 생산력을 증가시켜 경영형 부농 또는 광작농(廣作農)이라고 일컬어지는 부농층을 형성하게 하였고, 나아가 농촌사회 여러 부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광작 농장에서의 공장 체제 (경영형 부농이라고도 했음) 조세 금납화 시세가 바뀌는 각종 상품이 아니라 쌀로 냄으로써 더 합리적이고 발전된 제도가 됨, 더 나아가서 실체가 없는 돈 (금납화) 이 됨. 이렇게 갈수록 근대사회로 발전하는 것임. 금난전권의 폐지 난전 (시전 말고 행상) 설립 가능, 상인증가. 민영수공업이 커지면 공장.
현대사회는 계층 (수저) 은 있지만, 계급은 없다 상속되지 않음. 노력에 따라 (강원랜드는 계급사회로 나라가 돌아가려는, 막아야 하는 일) 양반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몰락 양반을 고용해 배우는 점을 희화화한 소설 양반전. 근대화의 모습이 보임
북학파 박제가. 상공업을 중시하는 사조가 들어오는 게 자본주의 산물이기 때문.
정치의 근대화 입헌 (왕의 권한을 줄이고 신하의 공론 후 왕이 추임하는 체제로) -> 탕평 (여러 정당이 건의) 상소 (사간원 등), 이들은 현대에는 국회가 하는 견제 역할
내발론의 이유 정체성론 (“한국 역사에는 진보가 없다"라는 이론. 여기서 ‘정체’란 자아를 뜻하는 게 아니라 “느리다”, 즉 ‘차량정체’ 할 때 그 정체를 말한다.)
한계 하나 상업 자체는 고대부터 있었고, 상인이 땅을 사서 지주가 됨. 근대로의 발전이 아님. 둘 결정적으로, 각 사건의 연속성이 없음. 개화파라든가 개화 직전에 실권을 쥔 흥선대원군 등의 실학의 연결성이 되게 어설픔. 유일한 게 박지원 (국학파) 의 손자가 박규수로 개화파 정부 요직이 된 것으로 끝. 그마저도 평양감사로 평양시민이 셔먼호 불태우고…. 끝. 일본과 비교해보자면 러시아 배의 난파를 통한 수리 요구를 통해 최초의 근대식 조선 경험을 쌓음 (이라고 해석)
수요일: 내인론과 외인론
따지고 보면 식민사관도 근대화론의 변형이 아니냐? (마르크스의 인도 관찰 후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키워드는 정체)
조선 망한 원인을 내부에서 찾으면 내인론 (갈등 등) 외부에서 찾으면 외인론 (방해 등)
내인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흥선대원군. 영조 장조 (사도세자) 정조 순조 헌종 대가 끊김. 사도세자의 다른 아들의 자식들이 속속들이 양자로 들어감 (2번) 2번째가 고종 그 아버지가 흥선군 (철종의 양자로 보냄). 왕의 아버지가 살아있는 건 처음이 되기에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받음 (왕의 부인의 아버지 부원군은 많지만, 대원군은 최초). 정조 이후로는 어린 왕 순조 - 수렴청정 (발을 내려놓고 들어서 정치를 해나간다), 대리정치. 흥선이 정권을 잡아도 세도정치의 근간을 공격해야…. 서원철폐. 땅에 떨어진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 정비 Q10 흥선군은 왜 세도정치에 대항할 세력을 키우고 백성 마음을 안정시킬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A10 그의 머릿속에는 백성 대신 왕권 강화 (봉건적 왕권) 가 있었다. 결국, 근대화를 위한 열망은 있었다 해도 동상이몽. 즉 ‘왜 외세와의 협의가 불안정했을까?’ 에 대한 답은 : (고등학교까지의 답안은 외세, 일본이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했겠지만) 당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걸 지키는 게 우선. 결국, 봉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종의 ‘나는 사과할 수 없는 존재다’ 드라마 말처럼…. 그 관습을 깨고 권력을 양보하라는 거 자체가 어려운 얘기.
봉건적인 그들은 근대화로 가는 길을 막는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Q11 흥선군은 왜? 쇄국했는가. A11 서양은 물건을 꾸준히 찍어 내기 때문에 교역하면 우리가 진다. 내부에서 준비하자. 예로 셔먼호가 불탔는데 거기 엔진 해부하라고 지시. 하지만 내정에서 실패, 지지를 못 받음. 고종은 ‘문을 열겠다.’ 프레임으로 아버지를 이김. 개화파를 등용함. 이는 근대화인가 왕권 강화인가? 또 다른 왕권 강화였다.
일본은 서툴렀다. 일본에 개항된 건, 아직 미숙하므로 거친 나라여서 피해. 강화도 조약을 통한 중국과의 관계 단절로 한국에서 큰 반발. 일본도 예상 못 했을 것. 결국, 청일전쟁 발발. 또한, 일본도 갑신정변 때 즉시 군대를 투입할 수 없었음 (청나라군 때문에) 결국 식민지화에 10년 기다려야 했음.
【비교】
김옥균도 열심히 하려 한것(자신도 귀족이라 먹고살 수 있는데 한 걸 보니)이지만 문제는 일본에 의지한 것. 친일파의 원형. 이완용도 독립협회에 소속된 사람인데 사람 가치관이라는 거와 별개로 역사는 엄정하다. (현재 우리도 통일을 위해 미국에 의지하고 있음) 일본은 왕비를 죽임으로 인해 고종이 러시아(땅인 대사관으)로 망명하고, 청일전쟁이 끝나서 청나라 땅을 가지려 하니 러시아가 반발해 또 러일전쟁으로 10년으로 낭비하고 막대한 경비도 치름. 고종의 마지막 개혁이 광무개혁. 현재 왕실에서 세웠다 하는 그런 학교는 다 그때 세운 것. 그리고 돈이 부족해져 각종 이권 (금광채굴권 철도부설권) 등을 팖. 그러나 황제는 서툴렀고 무엇보다 너무 늦었다. 그리고 이때 고종 정부는 여론을 모르고 국민과 소통을 못 하지 않았나. 온건개화 갑오개혁은 이미 일본이 견제세력이었던 청나라를 이긴 뒤여서 켕길 게 없어졌으므로, 일본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됨. 개화는 무엇보다 그들의 라이트 중국이 이미 동도서기니 중체서용이니 하고 있어서 쉽게 들어옴.
양반 수구세력 척왜양이 위정척사파야말로 반외세 항일에 가장 강력하다. 척왜양이가 동학군이 든 구호기도 함. 의병전을 처음 시작한 건 양반들 유인석. 독립군의 원류가 됨. 자주적 근대화는 체제변화도 있지만 자주 즉 주권유지에 수구파가 결국 공헌하게 됨. 한계는 양반과 평민 의병 김백선 안승우 간의 대립을 보면 알 수 있다. 선방에서 평민의병장이 돌격하는데 후방에서 지원을 안 하고 이에 항의하니 사형당함. 봉건적인 체제의 한계. 또한, 대원군을 몰아낼 생각은 안 했다. 하지만 1차 봉기는 사또 조병갑에 저항했으므로 봉건제에 저항 민주주의를 지향 근대적, 2차 봉기는 청일전쟁 외세에 반했으므로, 2가지에 다 걸리기 때문에 자세하게 가르침.
【결론】 두 세력 모두 노력 특히 반외세에 대해 노력은 했다. 한계로 근대국가로 가는 기본적인 생각이 아주 달랐다.
외인론은 다 아는 그거.
일본도 시행착오를 했다. 조선을 괴뢰국으로 세울 생각도 하고, 그러므로 일본 입장으로썬 당연한 요구를 했던 셈.
다만 조선은 시간을 적당히 벌지를 못했다.
TMI : 프레임을 세우는 게 중요!
목요일: 31운동과 일제강점기, 만주사변의 배경과 일본의 실책들
Q12 일본 엘리트들은 왜 목숨도 보장 안 되는 조선으로 갔을까? A12 돈 더 주고 가산점 주니깐. 역사는 일단 상식적이고 타당하게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억압과 수탈 방법. -땅을 뺏어서 일본인에게 나눠준다 -회사령으로 일본 기업 수립 활동에 훨씬 유리하게
그래서 31운동. 【구분】 위수령은 지역을 지킨다는 의미 (대학 위수령. 집에 가!) 계엄은 사회 전체를 군인이 지배하는 것. 그런데 31운동 뒤 상시 계엄함; 그래도 시위가 잦아들지 않음. 일본인은 그 이유를 수탈을 많이 해서 화났구나! 라고 생각하지는 않음. 당시 돈을 빼앗았기 때문에 분노했다는 기사는 적음. 31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농민이 아니라 학생 지식인. 그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인으로서 느끼는 차별 (좋은 대학도 못가고…). 이었을 것. (뒤에 박정희에서 설명하지만, 이런 차별이 가장 뼈아픈 것) 그래서 친일적 지식인을 만들지 못한 일본의 실책이다 (박은식이 공식적으로 밝힌 내용). 그렇다면 왜 주변 (지식인이 아닌) 사람들도 다 참여했는가? 그건 수백 년간의 생활을 모두 바꾸는 강압적인 근대적 (시간 절약. 단정) 억압에 대한 반발이다.
그래서 일본은 문화통치로 슬금슬금 친일파 생성 시작. 예로 경성방직을 세운 그런 사람도 친일파. 친일 짓거리를 조금만 시작하자! 라고 하지만 친일파들은 멈출 수가 없다. 한편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일본에 맞서는 사람들이다. 마침 그때 스탈린이 적극적으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니까 Q13 왜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빨갱이인가? A13 우리 편이 돼줄 사람이 오직 공산주의 진영뿐이라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빼고는 미-일은 항상 같은 편 ㅎ) 20년대 일본은 한편으로 동양척식㈜ 를 통해 땅놀이를 했으므로 소작쟁의가 자주 일어남 (농민이었던 사회 다수 구성원이 노동자로 바뀐 현대 입장으로는 파업쟁의 정도). 하지만 일본이 이 정책을 수정하지는 않음 (이게 식민지야). 그만큼 쌀을 갖고 가야 할 필요성이 있으므로 (이를 통해 일본 쌀값을 안정, 쌀을 먹는 노동자 임금이 유지. 우리나라도 박정희 때 사용해 지금도 내려져 오는 낮은 쌀값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책). 한편 20년대 경제는 전쟁 후 불황. 장기화 (결국엔 대공황 터짐). 그래서 일본도 힘듦. 관동대지진 농업금융공황 대공황. 2가지 정책 펼침. 1 만주진출 시장개척 -> 만주사변, 화북시장이 탐나서 중일전쟁 (그때 중국이 국공합작으로 반항해 전쟁 장기화), 미국의 제재 (석유를 끊음), 태평양전 시작, 조선은 농업에서, 경공업도 아니고 중화학 공업. 이건 조선 처지에서도 설명할 수 있는데, 공황이 오니까 조선인이 실직하고 곡기를 줄임, 쌀값 하락, 일본 농민의 반발 (조선 쌀 수입 금지 요구), 식민지 경제 위태, 공업화 필요성 대두. 이렇게 되어 결국 중화학 공업 유치. 하여간 공업화 덕분에 일본은 매우 빠르게 대공황 탈출, 조선 기업도 만주로 진출 (경성방직 -> 만주 방직). 30년대는 경제적으로 굉장히 좋았던 시기. 2 농정도 바꿈. 농정 (농업정책) -> 농공업 병진 (고르게 발전), 조선소작령 (지주 탄압), 자작농 창설 운동, 농촌이 일 안 하는 게 문제다 (이데올로기) 즉 농촌진흥 운동 (빨래할 때 시간 뺏기니까 흰옷 입지 말아라 등등.).
하지만 중일전쟁을 통해 여유가 없어져 동원체제 구축. 총 치밀한 3단계. 1 자원입대 ( 홍보, 이광수 등의 문인을 통한 찬양 ) 2 자원을 가장한 강제 ( 제국대학 엘리트들이 모범, 민중들은 경외 ) 3 결국 징병 ( 조선인에게 총을 쥐여주는 위험 존재, 조선인 관리 장교 필요, 조선인 일본인 통역 장교 필요, 그러므로 마지막 수단 )
일본의 또 다른 실책 “관리할 때는 분리해야!” 하는데, 한국말 사용금지 창씨개명 등으로 국민 대통합 분노 이슈 생성.
TMI : 31운동 설명할 때 어조가 이전 수업과 다른 이유는… 현재도 많이 논의가 오가는 분야이기 때문
TMI : 베트남은 승전국 식민지였기 때문에 45년에 해방되지는 않았다. 만약 일본이 2차대전에 서방 편이었다면 독립이 몇 년은 늦어졌을 것
넷째 주
월요일: 건국절 논쟁과 해방 후 정국, 이승만의 재선, 독립운동의 한계
간단한 쟁점 ‘우리나라의 시작을 언제로 해야 하는가?’ 후보들을 보자. 개천절 한민족의 시작. 근데 그게 끝. 31운동일 장 이승만 정부에서도 정부를 재건했다고 썼으며 시작은 31운동이라고 언급. 단 31운동 자체는 국가를 선포한 날은 아니다. 회사를 법인화한 게 아니라 그냥 아이디어만 낸 날 정도. 4월 11일 현재 가장 큰 지지 (현 정부)를 받고 있음. 13일은 그간에 잘못 알려진 역사적 오류. 장 상해임시정부 내각에는 내로라하는 인물이 다 들어가 있고, 무엇보다 좌우 인물이 통합된 정부. 연해주 공산주의자들이 31운동을 계기로 상해로 모임. 단 “진짜 정부가 아니라 해외에 있고 망명 임시 국민영토 없는 아무것도 없는 정부이므로 상징성에서 임시정부를 이어받고 계승하는 건 알겠는데 정부의 시작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논쟁의 시작) 4월 23일 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 장 국내에 수립된 유일한 정부라는 의의 (상해임시정부의 또 다른 약점: 임시정부가 여러 개 있다) 9월 11일 아주 잠깐 모든 임시정부가 통합된 날. 45년 8월 15일 해방일. 그냥 해방된 날이지 국가를 선포한 날은 아니다. 48년 8월 15일 현재 2번째로 강력한 지지를 받는 날. 대한민국 정부 제1공화국 제헌헌법 (은 제헌절) 하여간 정부가 수립된 날 // 이런 날들의 의미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함.
해방 후, 남한은 UN에 정부 수립을 판단 맡길 (김구든 이승만이든 대표자를 뽑아주라) 것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UN이 친미적이라며 거절. 그래서 남한만 총선거로 국회의원을 뽑음. 국회의원이 헌법을 만듦. 그리고 국회의원끼리 투표를 해서 대통령을 뽑았다. 우리나라의 시작은 미국식 간선제. 당시 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이었기에 2대 총선거 직후에 625가 터짐. 총선거 전, 김일성과 담판을 짓겠다고 김구가 감. 그러나 버스는 떠났고, 그때 남한 내 공산주의자가 반란을 일으켜 민간인이 죽은 게 43항쟁. 총선거는 5월에 이루어짐. 한편 그걸 진압하던 부대가 반란 (부대 내 좌익 군인), 군인 중 한 명이 박정희 (남로당 계열). 김구를 따르는 사람들은 1대 총선거에는 참여 안 함. 2대 때는 김구가 암살당한 후이므로 참여를 함. 따라서 2대 국회의원은 반이승만적인 사람이 많음. 이때 재선을 못 할 것으로 생각한 이승만은 사사오입 발췌개헌 등을 함. 심지어 임기 말인 전시에 (52년에)! 있던 일. 결국, 대통령 직선제로 바꿈. 알아야 할 것은 해방부터 이승만이 재선까지 당선된 과정이다.
그래서 하여간, 선포한 날이 48년 8월 15일이다. 그런데 Q14 왜 이승만 자체도 건국이 아니라 정부 수립이라고 이야기했을까? A14 자기가 임시정부 요인이었으니까. 지금의 문제는 첫째, 결국 북한의 역사도 같이 봐줄 것이냐 남한 단독의 역사를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북한의 영토는 대한민국 것으로 명시가 되어 있다. 둘째, 친일 세력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을 ‘포로로 대우해달라’ 고 했는데, 일본은 코웃음 쳤다. 그런 개념으로, 독립군 등의 운동에 대한 평가와 위상이 굉장히 위축될 수 있다. 그래서 대한광복회 같은 경우, 꽤 보수적인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48년 설을 굉장히 비난하고 19년 4월 11일설을 밀고 있다. 또한, 친일파는 비난의 첨예함에서 조금 둔화될 수 있는 상황도 만들어진다.
일제는 31운동을 천도교 폭동으로 봤지만 1년 동안 크게 퍼짐. 하지만 독립운동의 큰 문제는 좌우합작이 안 됨.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부로서의 위상을 가지려면 좌우합작이 되어야 하는데, 좌우가 합심해 정부를 세운 적이 한 번도 없다. 해방 이후의 남북 분열도. (자유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를 갖는 말이다. 자본주의라 해야 할 듯) 왜 공산주의가 한국의 독립을 많이 지원해줬을까? 현실적으로, 영국 미국 등은 일본의 러시아 남하를 좋아했고 러시아는 안 좋아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서구 일본 밀월관계는 중일전쟁 외에는 항상 유지됨. 그때는 경제 제재 및 석유 끊기) 즉, 조선에서 사회주의를 독립운동에 ‘이용’ 하자고 시작된 것. 예) 청산리 전투 후 일본이 보복으로 만주 한인을 괴롭히니까 독립군은 소련이 지원해준다고 해서 북상함; 그런데 소련은 기대만큼 하지 않고, 독립군 내분도 있고, 결국 자유시 참변 후 독립군 무장세력이 약해짐 … 이 구조를 알아두기. 우리를 지원해준 건 소련과 중국 공산당. 그의 무장세력인 팔로군의 일원으로 가입되기도 하고, 김일성 부대는 소련 부대 내에 들어가기도 하고 … 그리고 코민테른 (지원단체) 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우익 세력과 결별하라고 지시하기도 … 결국 좌익 독립운동가들은 그걸 따름.
독립운동에서, 30년대에 가면 20년대와 달리 국면이 달라진다. 이유는 2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달라진 국면은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 대륙에서 일본군의 활동이 강해지고, 화북 지역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도 압력을 더 받음. 힘을 키워야 함. 두 번째 달라진 국면은 중국의 국공합작 (장개석 정부와 모택동간의 합작, 중국이 먼저) 우리나라 좌우익 이데올로기를 달리하지만 역시 항일이고 독립하려던 우리 내부에서도 필요성과 명분이 높아짐. 그 결과로 통일 동맹이 결성되고 유일 당으로 민족혁명당이 창립되지만, 다 된 줄 알았지만, 마지막에 비토를 건 게 임시정부 세력이다. 김원봉이 좌파 사회주의 독립운동 단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김구와 협상을 벌이지만 이를 대비한 김구는 비참여 세력을 규합해 임시정부 내의 단체로 ‘한국국민당’ 창당. 해방 후 이 정당도 임시정부와 같이 들어옴. 이 정당은 대한민국 정부로 스며들어오는데 그 이름은 국민당이다. 김원봉 - 김구는 중일전쟁 이후인 40년대에 합작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나마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이름으로 합작이 이루어짐. 김원봉이 양보, 밑으로 들어가서 총사령관 격을 맡는다. 하지만 김일성이라든가 기타 공산당의 무장세력이 포함이 안 됨 (허가이, 무정 등). 정작 무력적인 이 부대들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내에 속해있기 때문. 이들과 교섭해서 완벽히 만들어 주겠다 하고, 미얀마 전선 등에 광복군 보내기도 하고, OSS에 청년들을 훈련하기도 하던 그런 상황 중에…. 해방. 2차전 후 프랑스는 다 인정받고 좋은 거 했는데, 우리는 인정받지도 못하고 (광복군은 겨우 몇백 명 수준으로 진짜 강력한 부대는 중국이랑 소련 김일성 부대 들인데…) 그대로 멈춰짐. 미국과 소련이 자신의 편의에 따라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38선을 긋는 등… 가장 안타까운 부분.
좌우 임시정부의 한계. 찬탁/ 반탁으로 frame이 나누어서, 미소공동위원회를 김구가 친탁통치로 받아들였는데, 동아일보에서 오보 (미국은 독립을 원하는데 소련에서 친탁통치를 원한다) 가 나서, frame의 고착화 (공산은 친탁은 매국, 자본주의는 반탁은 애국) 어쩌면 모스크바 3상 회의를 통해 나온 결과에 김구가 너무 발끈한 건 아닐까. 하여간 그 덕분에 친일파가 반탁에 붙어서 부활. 친일파가 기회를 잡고, 친일청산 frame이 안 나오도록 함.
미국을 잘 아는 이승만. 48년 건국설은, 이와 같은 많은 역사와 가치관을 버려야 하고, 19년은 공산 진영 포용과 다양한 …을 모두 평가해야 한다. 결론: 좌우합작이 되지 않은 대가가 너무 크다. 이제라도 좌우합작이 되어야 한다. 친일파 처벌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다.
TMI : 중도는 힘들다. 현재 안철수, 과거 중도좌파처럼.
화요일: 미국과의 쟁점, 미군정
반미라는 강령. 기존 반미 그 기본은 일본처럼 완전 식민지를 노린 제국주의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 있어서 그런 야욕을 보인 적은 있다. 대표적으로 남북분단의 주범이다 (어제도 얘기했지만). 그리고 원조에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다 (잉여농산물 강제증여) 또한 미국은 딱 7년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 빼고는 일본이랑 밀월관계. 동북아시아의 중심국가로 일본을 선택함.
518 당시 계엄군 파견은 미군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에, 새로운 반미감정이 탄생. 미국은 이것에 대해서 해명을 제대로 하지 않는 상태. 한미상호방위조약 518 당시엔 (90년대 초반에 평시 작전권을 가져옴) 평시, 전시 모두 작전권이 미국 측에 있다. 작전권은 자신들 위수지 밖으로 군대를 옮기는 것. 없이 옮기면 쿠데타, 반역죄. 반미의 표면화. 미 문화원 방화 사건. 친미, 반미가 지금은 하나의 역사관, 가치관이 됨.
한편 미국은 신미양요로 좋지 않게 만났지만, 개화파가 득세하면서 일본 다음으로 수교한 나라가 됨. 우리나라가 늘 기대하는 나라로, 김옥균이 처음 도움을 요청한 나라도 미국. (일본이 아닌 걸 볼 때, 조상들도 한 외세에 절대적으로 힘을 의존하면 부작용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긴 했다) 하지만 미국은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 이유로는 중국에 족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의 미 안내 책자에도 쓰여 있음). 그런 미국이 우리나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결국 국익에 도움이 되는 즉 해방 이후부터. 태평양전쟁 후, 미국이 ‘아 아시아에 기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분단시킴. 우리나라는 냉전 때문에 중요해진 나라. 친미정권 수립이 중요해짐. 아직도 미군은 사실 중국 견제 덕분에 남아 있는 것.
미군정의 공 첫째로 일제 전시체제의 해제. 사상범예방구금법은 불순분자의 발언권 자체를 뺏어버리는 악법. 둘째로 통일국가 수립 노선을 지지함. 좌파는 김일성을 제외한 상황에서 중도파 중심으로 정권을 세워보자 함. 이는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노선이었을 것임. 미국이 이를 지지함. 미군정의 과 기존의 현상유지. 친일파 청산은 실패. (주의! 이런 말은 틀린 말이다. 미군은 우익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친일파를 의도적으로 육성했다) 국민 생각에 우익은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좌익은 굉장히 선명한 항일. 또한, 우리를 지배한 일본이 자본주의 국가라 별로 좋아하지 않음. 그리고 경제 문제는 국민이 참지 않는다 (이승만 정권이 되어야 토지개혁. 큰 공. 지주층이 경제 주도층에서 밀려나 공업 국가로 간 것도 공. 부의 재분배. 한국전쟁이 겹치면서 지주의 몰락. 그들은 국채를 받았으므로 + 전쟁 인플레로 돈을 가진 자체가 손해).
쌀 원조 -> 물고기 잡는 법으로 경제재건원조 (기계) -> 전쟁으로 긴급원조 -> 전후 경제부흥을 위한 재건 원조. (원조의 흐름만 알자!) 잉여농산물 원조가 별도로 있었다. 미국이 국익을 위해 강제한 원조. 우리가 원조에서 졸업하는 게 70년대인데 25년 동안? 대략 44억 당시 달러. 60년대에 들어오면서 원조를 줄이려고 하고 (아예 주는 대신 빌려 가라는 제도), 박정희 정권은 새로운 돈이 필요해 일본에 접근했다. 국내농업타격. 삼백산업 제분 제당 제면 중시. 불균등발전 특히 잉여농산물은 별도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것을 받은 사람들이 성장할 수밖에 없다.
그림 : 매년 정부가 필요한 예산안을 미국에 제출함 (미국 세금이므로 미국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므로). 흥정 보는 게 한미 합동경제(위원회). 수리시설 같은 게 필요하면 일차적으로 미국 기업에 발주. 돈을 미국 정부가 내는 시스템. 물품이 올 때까지 우리가 하는 건 행정적 처리뿐. 들어온 후에는 물품을 수리시설 제작회사에 발주함. 그러면 회사는 물품을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고 정부가 제시한 가격으로 구매. 여기서 재화 발생. 이를 대충자금 (counterpart money)라고 함. 기업에서도 이게 유리하다. 기업은 시장조사를 할 게 아니라 정부에 사과 상자 하나씩 들고 가야 함. (정경유착의 발생) 대충자금은 일단 국방비에 많이 씀. 포항제철. 왜 가난한 나라가 천문학적 액수로 제철소를 만드는가? 돈 미국이 아닌 일본 청구권 자금. 일본의 기술을 받아들이고. 제1 용광로에는 일본 엔지니어의 이름이 붙어있다 (신일본제철).
이승만의 공은 한미상호방위조약. 미군이 전쟁 후에도 주둔. 전쟁터에 미군이 상주한다는 뜻. 즉 유사시 바로 개입. 이승만은 이걸 맺기 위해 북진통일론 주장하고 강경. 철조망 끊고 포로 도중 석방. 등등…. 미국이 열 내게 하고 발목을 잡아놓음.
TMI: 전두환에 대한 비난은 독재를 했다도 있지만, 무엇보다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518) 최종 결정권자다.
수요일: 한미관계, 한일관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2가지 의미 1 구조 한국전쟁이 그나마 한국에 주는 선물 (미 지상군 주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국가의 제한 없는 원조 2 상황 휴전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 미국의 수만 명의 지상군이 주둔하는 상황. 중공군은 북한에서 철수하는데. 현재까지 달라진 건 -평시 작전권 반환 -유엔군의 역할 줄어듦. 주한미군 (현재는 제2사단) 사령관은 유엔군 사령관이자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 유엔군사령부는 사실 별 의미가 없어진다. 한국전쟁 후 일주일 만에 유엔군이 파병된 이유: 소련이 비토를 행사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들의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함이라는 게 정설. 지휘체제는 통일되어야 하기에 한국군은 유엔군에 들어가고 작전권도 줌. 하지만 ‘53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시 새로 논의해야 했는데, 변함없이 작전권을 주는 거로 체결. 이 부분에는 문제가 있다.
【정리】 3가지 한미관계에서 전체적인 흐름, 본격적인 관계를 맺은 미군정, 한국전을 계기로 2가지가 더 강력해졌다. 직접통치는 3년으로 끝났고, 경제적 원조 군사적 방위조약 원조는 70년대에 끝났지만, 현재도 경제와 관련된 관습 (정경유착 산업간불균등발전 등)을 남김. 하지만 강력한 공 (고도성장의 토대 결정적 역할) 원조는 현재 FTA로 대체되어 있지만, 여전히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한국에서 대단히 크다.
현재 한일관계는 최악이다. Q16 일본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A16 독일의 경우는 나치 잔당이 제거되었고, 나치 찬양이 불법화되어 있다. 일본은 군국주의자들이 남아 있다. 독일은 모두 처리되고 현재 유럽의 맹주가 되었지만, 일본은 전범 12명은 인정하지만, 뒤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 … 그리고 무엇보다 천황제를 폐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군국주의의 핵심이 천황. 일본의 근대를 중심을 이루는 게 천황 (메이지) 그리고 만들어진 게 육군 해군. 근대화와 군국주의는 뗄 수 없음. 결국, 근본적으로, 천황은 일본 근대화의 자부심이자 군국주의의 자부심. 천황과 이 두 가치는 분리가 안 된다. 군국주의 자체만을 부정할 수가 없게 되는 것. 일본은 야당이 정권을 잡아도 우익과 분리되진 못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일관계가 시작된다. 협상의 시작은 선박반환 문제. 협상은 기왕 시작된 거 여러 의제가 들어갔으나 난항. 이때 청구권을 배상권이 아니라 그냥 경제협력으로 해버림. 민간상업차관 한국 투자에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푸시한다. 한일협정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명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제2조 (a) 독도가 빠짐. 제4조 (b) 미군정이 들어와 일본의 민간인 재단을 몰수하고 한국에 불하했음 (SK, 한화 등 생성)을 인정한다. 미국도 사실 책임이 있고 좀 께름칙하니까 일본에 저 조항 넣으라고 한 것. 그래서 한일 간 싸우면 미국은 ‘이 조약으로 책임 끝났다’라고 할 수 있는 것. 독도에 대해 지금 미국에 물어보면 침묵.
이렇게 우리는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개발을 위해 역사를 상품처럼 팔았다. 덕분에 외교가 핀치로 몰렸다. 이미 협정한 걸 파기하겠다는 것도 사실 20세기 후반으로 와서 전례가 없는 일. 또한, 일본인들이 한국 기업 기술 이전에 고생하며 큰 도움이 되었지만, 현재 대기업에서 모른 체하고 인정해주지도 않는 것은 어쩌면 남북관계 진전에 따른 우리의 (북한에 간) 모습이 될 수도 있다. ‘배은망덕’ 논리의 현실화. 한편 일본이 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건 현재의 대일 의존적 경제구조와 만성적 대일무역적자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일본 우경화에 새롭게 이용되는 논리는 굉장히 뼈아픔.
목요일: 박정희 시절의 경제개발
사범은 당시 일제강점기 열악한 교육 차별 때문에 조선인 엘리트의 대학. 그러나 더 야망이 컸던지 일본군에 들어감. 천황폐하에게 혈서를 쓴 거로 논란도 됨. 박정희의 인생사. (박상희 여순반란 숙청 불명예제대…. 625…. 별2개…. 지금의 위상보단 높은 지위) ‘이제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면 안 된다’ 는 얘기로 쿠데타. 구조만 보자면 1. 정상적인 민주절차로 정권을 잡았다고 만들어야 함. 처음에는 ‘민주당이 맨날 싸우고 사회는 온통 데모고…. 혼란하고 경제도 망하고 내가 구국의 뜻있는 장교들 모아 한다’ 육사 8기들. 가장 동기들이 많고 (한국전쟁 당시 소대장, 신임장교들) 많이 희생되었으므로 자부심도 있고, 친일에서도 혐의가 멀고. 민주당 당시에 여러 개혁이 생기고, 깡패들을 조지고, 경제적으로는 부정축재처리법이 생기고. 하지만 군의 요구를 무시함. 그래서 나는 안정되면 돌아가겠다, 대통령 안 하겠다고 함. 2. 친일 프레임은 어느 정도 감출 수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 굳건 덕분에. 하지만 김일성에 비교하면 열등감이 있음. 그래서 김일성 가짜설도 나옴. 하여간 문제는 다른 데 있음. 본인이 좌익 군인이라는 것 그래서 혁명공약에 혐의를 벗기 위한 반공 국시가 쓰여 있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보도연맹 학살사건. 박정희의 문제는 미국의 의심 (좌익인가? 친미정권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래서 대통령 이전 군인 신분으로 미국에 날아가 증명하려고 함. 먼저 꺼낸 것이 베트남 파병 가능하단 얘기. (무시해선 안되는 게 당시 너무 못사니까 장준하도 그렇고 다들 지지함.)
경제개발의 쟁점은 박정희가 아니어도 경제개발이 될 거 아니었을까 하는 것. 실제로 70년대는 황금세대가 맞음. 이게 박정희와 기술관료들의 공로인가? 그렇지 않은 거로 들 수 있는 게 이승만 때부터 원조물자로 토대를 닦아놓은 것이다. 물론 박정희가 군대 심보로 부정축재 처리를 밀어붙여서 장면 정부 당시 경제 5개년 계획 담당인 장준하도 박정희를 지지한 것. 하지만 장면 정부 당시 5개년 계획도 있고. 이승만도 ‘58에 5개년 계획을 한 건데. 즉 박정희의 독창적인 게 아니다. 그리고 둘째는 국민이 근면하게 노력한 거지 박정희가 잘한 게 아니다. 셋째로 냉전 호황 속에서 공산 진영에 대한 선전마을이 되어야 하기에 미국이 조악한 물품을 많이 사준 것.
사실 현재로는 독재자냐 지도자냐 하는 건 병존한다. 경제성장의 큰 틀을 보자. > 수입대체를 한다. > 내포적 공업화를 한다. Q17 왜 우리 힘으로 했을까? A17 원조자금이 부족하고, 빌릴 돈이 없고 국내에서 돈을 짜내고 싶다. 현재 하는 소득주도성장으로 (농민들의 빚 탕감. 그냥 군인들이 없는 것으로 한다고 선언) 농가 고리채를 탕감해주니 소비가 늘고 공장이 제품을 더 많이 생산할 것이다. 하지만 돈이 부족할 텐데? 그래서 부정축재처리법으로. 하지만 한계가 나오고, 결국 화폐개혁. 집에 돈 쌓아놓는 사람의 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하지만 실패했다. 끄집어내기 전에 제조업 중소기업들이 버티지를 못함. 뭐 결국 답은 수출. 달러가 들어옴. 환율은 정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음. 달러가 너무 좋음. 그래서 가발부터 가마니 쥐 가죽 장어 가죽 등등 다 팖. 사실 처음부터 공업화의 생각은 없었겠지만, 배 한 척 파는 게 더 효율이 높으니까…. 정책이 이런 식으로 집중되니까 내수시장에 대한 신경은 없어짐. 80년대에 잘된 일은 구조조정. 수출중심 하다 보니까 어느 분야에는 과잉. 돈만 따내려고 만들다 망하고…. 80년대 들어와서 강력하게 강압적인 명령 (현대 너희는 큰 엔진만 만들어). 그 이후의 일은 단 하나. 국가개입을 줄이며 민간에 경제를 맡기는 것.
이승만 시기의 경제계획과 다른 점은 뭘까. 정부의 실행 의지 (페이퍼플랜? 아니면 진짜?) 가 다르다. 경제기획원 설치. 당시에도 기획처는 있었지만 그건 처고 재무부와 엄청 싸워야 했다. 그래서 부총리급의 경제기획원을 만들어서 더 위에 있도록 함. 또한, 산업을 여러 가지 할 수 있도록 대기업이 미쓰이 물산 등등을 벤치마킹해 상사를 만듦. 미쓰이를 벤치마킹한 게 현재의 삼성물산. 부작용 : 정경유착. 망하는 기업 생김. 망하는 기업은 박정희 때 8.3 조치로 부채를 중지시킴. 5년 동안 안 갚아도 됨. (정설 : 독재자가 필요하다. 중국처럼) 그러다가 IMF 때 된통 당했다.
역사를 보는 데 있어 시각과 주관을 기르라.
TMI : 왜 기업가들에 관한 이야기는 안 하는가? 캔두이즘. 울산대의 정주영학. 그 부분도 분명 있긴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