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교정, 그중에서도 미래의 석학들을 불러 모으는 대학원 모집 포스터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선다.
인류의 지식 경계를 넓히기 위한 치열한 탐구를 제안하는 그 자리에, 어김없이 ‘넙죽이’가 해맑게 웃고 있다. 성별도, 나이도, 심지어 뚜렷한 종(種)의 특성조차 삭제된 이 매끈한 생명체는 이제 친근함을 넘어 지적 피로감을 유발한다.
넙죽이 자체는 훌륭한 마스코트다. 학생들에게 소속감을 주고, 딱딱할 수 있는 학교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모든 메시지를 넙죽이라는 단 하나의 필터로만 내보내려는 안일함이다. 양자역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연구실 소개든, 복잡한 금융공학의 세계로 초대하는 공고든, 넙죽이는 그저 동일하게 웃으며 모든 것의 무게를 균일하게 깎아내린다.
대학원 모집 포스터에서의 등장은 이질감마저 든다. 대학원 과정은 인류가 쌓아 올린 지식의 가장 날카로운 첨탑에 오르는 여정이다. 그 길은 무균 상태의 귀여움이 아니라, 때로는 고통스러운 사유와 실패, 그리고 기존의 통념을 깨부수는 날 선 지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예비 연구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돌출 장기 하나 없는 매끈한 캐릭터를 내세워 “이 험난하고 위대한 길이 사실은 아주 말랑하고 귀여워요"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는 지성에 대한 모독이자, 학문의 깊이에 대한 기만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래 순수한 응원과 격려의 상징이어야 할 마스코트가 정작 그런 역할이 필요할 땐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한다는 점이다. 학교를 외부에 상징적으로 알려야 하는 중요한 행사를 생각해 보라. 그런 역동적인 ‘자기표현’의 현장에서 넙죽이는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넙죽이는 소품이다. 마치 그동안 포스터에서 많이도 보였던 모습이, 그냥 들러리 역할이었다고 항변하듯이. 주인공의 자리는 최근 임용된 지드래곤 같은 압도적인 유명세의 셀러브리티가 차지한다. # 넙죽이는 가장 활발하게 뛰어놀아야 할 마당에서는 뒤로 물러나 있고, 가장 진지해야 할 학문 탐구의 입구 (대학원 모집 포스터)를 지키고 서 있는, 기묘한 역할 전도에 놓여있다.
물론, 지쳐 쓰러진 동료 연구자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실험에 좌절한 이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것은 넙죽이의 텅 빈 미소가 아니다. 그건 바로 동료의 구체적인 조언, 선배의 날카로운 비판, 그리고 지도교수의 묵직한 격려다. 학문의 전당에 필요한 것은 몰개성적인 위로가 아니라, 개성과 깊이를 갖춘 지적 자극이다.
어쩌면 넙죽이의 범람은, ‘어렵고 복잡한 것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우리 시대 지성 사회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진리의 상아탑마저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스스로의 깊이를 숨기고, 가장 안전하고 무해한 방식으로만 소통하려 드는 것이다.
이제는 넙죽이의 시대가 저물고, 조금은 울퉁불퉁하더라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진 상징들을 보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맥락 없는 ‘안전한 귀여움’이 아니라, 학문의 본질을 꿰뚫는 ‘진짜 얼굴’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돌출 장기도 좀 있는, 그런 지성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