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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의 서울시탈출과 한강 인도교 폭파의 전략적 필요성 논쟁

[essay] 6 min read

KAIST HSS399.02 쟁점한국사 수업 레포트 (2018)

목차

  1. 논쟁에 대하여
  2. 이승만의 서울 탈출과 ‘다리 폭파’ 복기
  3. 논제 1: 지도자는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4. 논제 2: 이승만은 서울 사수를 주장했는가
  5. 논제 3: 이승만은 서울에 있다고 얘기한 적 없는가
  6. 논제 4: 폭파는 과연 전략적 가치가 있었는가
  7. 결론
  8. 참고문헌

1. 논쟁에 대하여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정확한 사료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아마 인터넷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이하 이승만) 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퍼진, 6·25 전쟁 당시 이승만의 국민 기만 및 도주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이 말을 녹음할 때 이승만은 이미 대전으로 피신했고, 다음날 국군이 한강다리, 정확히는 당시 유일한 차량통행 가능 다리였던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켜 수많은 서울시민이 대피도 못 하고 그대로 북한군을 맞게 되었다는 암울한 이야기도 함께 알려져 있다. 이 점을 놓고 보았을 때, 흔히 ‘런승만’ 이라는 멸칭과 함께 풍자되곤 하는 이승만의 서울 탈출은 사후 그의 위신을 깎아먹은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일각에선 ‘런승만’이 그의 실책으로 여겨질 이유는 없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주로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과 역사 애호가들이 이런 주장을 펼치는데, 이들의 근거가 흥미로워 오늘 이 사건에 대한 여러 의견을 소개하고 비평하고자 한다. 또한 이승만의 서울 탈출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이하 ‘다리 폭파’)도 같이 다뤄보려 한다.

2. 이승만의 서울 탈출과 ‘다리 폭파’ 복기

일단 이승만의 서울 탈출과 ‘다리 폭파’을 통해 이승만이 부정적 평가를 받는 이유를 사건 복기를 통해 정리하고자 한다. 6·25 전쟁은 북한 공산군의 새벽 남침과 함께 시작되었다. 수월하게 한반도를 밀고 들어온 북한군은 6월 27일 저녁에 전차를 앞세우고 서울 외곽을 압박하였으며, 28일 자정을 넘어서면서 청량리를 통해 새벽 2시경 홍릉 일대를 뚫고 들어왔다. 북한군은 또한 김포를 향하여 한강을 건널 채비를 갖추었는데, 북한군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채병덕 소장(당시 육군참모장)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다리 폭파’를 명령한 다음 시흥으로 내려왔다. 한강 인도교는 28일 새벽 2시 반에 폭파되었다. 북한 탱크가 서울에 진입하기 2시간 전에 폭파하라는 명령이었으나 최창식 대령이 기마경찰대의 말굽 소리를 탱크 소리로 오인하는 바람에 예정시간보다 4~5시간 앞당겨 폭파시킨 것이다.

이 때 북한강파출소와 중지도에는 공병경계분대와 헌병대가 배치되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신호를 무시한 채 달려 내려오던 수십 대의 차량들이 대파되고 수많은 인파가 파편과 폭음 속에 사상(死傷)을 입는 가운데 폭파 현장은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중 1개의 단선 철교는 폭파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나중에 북한군에 의하여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 폭파는 이승만이 지휘한 것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아니다. 이 때 이승만은 명령이 내려지는 서울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승만은 26일 교통부 장관에게 특별열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다음 날 새벽 2~3시경 영부인과 그의 최측근 인사들만 데리고 서울역으로 가서 두 칸짜리 대구행 특별 열차에 탑승해 4시에 떠났다. 그날 새벽 국회에서는 서울 사수론을 두고 치열하게 논쟁한 끝에 서울을 사수하자는 결론을 내고 경무대(대통령의 집무실)에 알리려 갔지만, 이미 이승만은 서울을 떠난 뒤였다. 즉 그는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을 국민뿐 아니라 내각, 국회, 군 수뇌부 아무에게도 통보하지 않았다.

이를 믿고 대피하지 못한 서울시민들의 결과는 처참했다. 폭파 당시 다리 위에 있던 수백 명의 피난민이 희생되었고, 서울을 방어하던 3개 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후송되지 못하는 차질을 빚었다. 서울시민 144만 명 중 100만 이상이 피란하기 위해 한강을 건널 수 없었기 때문에 인민군 치하에서 고난을 겪게 되었다.

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신성모 국방장관은 최창식 공병감을 9월 28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그날 오후 사형에 처하게 된다. 정작 서울 수복 후 이승만 정권은 서울에 잔류한 모든 시민들이 ‘빨갱이’라서 서울에 남아 북한군을 환영하고 친북 활동을 벌였다며 처벌했다.

3. 논제 1: 지도자는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일단, 국가의 지도자로서 구국의 운명을 이끌어야 할 책임으로 남하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존재한다. 이승만 자신이 1950년 7월 4일 전쟁 경과에 대해 대 국민 특별방송에서, “내 한 몸이 국군의 앞에 서서 죽음으로서 싸워야 옳을 것인데 피하여 나온 것은 구차히 목숨을 위해서 한 것이 결코 아니오 첫째는 성중에 있으면 군경전투상에 도리어 곤란을 당하겠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요, 또는 내가 나와 앉아서 세계에 호소해서 공론이 일어나야 할 것을 각오한 것이 두번째의 이유인 것입니다.“라고 밝힌 것과 연관이 있는 의견이다.

또한 주한 미 대사관의 노블 참사관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장관과 고위관리, 국회의원이 한강을 넘어 피신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후일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만약 이승만이 적에게 포로로 잡힌 경우 따라오는 결과는 무시무시하다. 국가원수의 상징성 때문에 아군의 사기와 전투력에 큰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을뿐더러, 북한에서 대통령의 항복 소식을 꾸며내 사기를 완전히 꺾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비밀스러운 탈출이 부정적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를 따라 군 수뇌부를 구성하는 신성모 국방과 채병덕 육군참모장이 개별적으로 남하한 것과, 이후 처신, 예를 들자면 자신의 탈출 사실을 교묘하게 숨긴 라디오 방송으로 국민을 기만했다는 데 주로 논의가 이루어져 있다.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저서 “이승만의 삶과 국가"에서 이승만의 심야 탈출을 임진왜란 때 한밤중에 한양을 몰래 떠났던 임금 선조와 비교한다.

4. 논제 2: 이승만은 서울 사수를 주장했는가

이승만에 대한 긍정론, 혹은 동정론은 그가 끝까지 서울 사수에 뜻을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확신 아래에서 작용한다. 당시 영부인 도너 프란체스카 여사의 사후 증언에 따르면 전쟁 발발 7~8시간이 지난 오전 11시 30분 무초 주한미국대사와 만났을 때 이승만은 ‘상당히 긴장된 모습이었으나 침착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으며 27일 새벽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시장이 남하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승만은 “안 돼! 서울을 사수해야 돼! 나는 떠날 수 없어!“라고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발언의 근거가 영부인의 사후 자서전이므로 중립을 증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상당히 영웅전기처럼 각색되어 있는 부분이므로 그대로 믿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또한 무초 주한미국대사의 회고는 이와 다른 부분이 많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이승만은 전쟁 발발 당일 남쪽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말했고 오히려 자신이 서울 사수론을 주장했다.

5. 논제 3: 이승만은 서울에 있다고 얘기한 적 없는가

이승만은 대전에서 전화를 통해 서울의 방송국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송출했다. 이때 ‘안심하고 서울에 정부와 같이 머물러 주십시오’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나아가 이승만의 해당 연설이 국민 기만성이 아니라는 반론이 존재한다.

미국 중앙정보부(CIA) 소속인 해외방송정보국(FBIS)의 『일일보고서(Daily Report)』에 따르면 방송 대부분은 미국의 군사지원에 집중되었다. 이승만은 ‘국군이 서울을 사수하였다’는 오해 발언의 원본인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였다’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방송에서는 의정부 패전과 서울 사수를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실질적으로 그렇게 공언한 것과 다른 바가 없었다. 함께 싸우자는 연설을 들은 국민은 대통령이 수도와 자신들을 포기하고 탈출하였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6. 논제 4: 폭파는 과연 전략적 가치가 있었는가

한강 인도교 폭파만을 놓고 봤을 때, 전략적 관점에선 결과적으로 공을 세운 것이라는 관점이 존재한다. 한강 인도교 폭파가 있은 후 의도대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3개 사단은 그 자리에서 승리의 잔치를 벌이는 등 3일간을 지체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로 한강의 다리가 파괴되었음에도 소련군이 충분한 도강장비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남정옥 박사는 한강 방어선의 최대 공로자를 폭파에 따른 한강교 절단으로 꼽았다. 한강 방어선이 그로 인해 지탱되는 동안, 맥아더의 한강 전선 시찰이 이루어졌으며 뒤이어 7월 1일 미 지상군 참전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한강 인도교 폭파에 있어 제기되는 문제점 중 하나가 ‘조기 폭파’이다. 왜 그렇게 급작스럽게, 예정시간보다 한참 앞당겨 폭파를 해 그만큼의 시간 동안 대피할 수 있었던 국민들의 길을 없애 버렸냐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군을 저지시키겠다는 전략 차원에서 볼 때 폭파가 일찍 이루어진 것은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일임이 변함없다.

7. 결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지탄을 받는 부분인 책임감 부재에 대해서는, 최소한 그가 혼자서 대전까지 탈출해 온 것은 국가 지도자로서의 큰 실책이라 보기 힘들다. 하지만 자신의 탈출 사실을 라디오 방송에서 숨긴 것은 검토 결과 국민에 대한 기만이 맞았으며, 이후 행동인 잔류파에 대한 탄압을 통해 이는 거의 확실시된다. 또한 그 기만이 국군의 한강 다리 폭파를 만나 증폭됨으로써 그 피해가 커졌으므로, 한강 다리 폭파가 엉겁결에 이승만의 또 다른 실책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업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강 다리 폭파 자체만 놓고 보면, 국군이 국민의 생사를 가벼이 여겼다는 점에선 좋게 평가하기 힘들지만, 북한군의 남하를 막아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적화통일 방지 및 조국 수호라는 국군의 또 다른 주 목표를 지켜냈다는 사실에서 고평가가 가능하다.

8. 참고문헌

사전

  • “한강교폭파사건(漢江橋爆破事件)”, 『한국민족문화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5)

  • 오인환, 『이승만의 삶과 국가』, 나남, 2013.
  • 이종하, 『재미있게 읽는 그날의 역사 9월 21일』, 디오네, 2016.
  • 도현신, 『국가의 배신』, 인물과사상사, 2015.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
  • 블라디미르 니콜라비치 라주바예프,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옮김, 2001.

논문

  • 張泳敏,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67, 2013. 겨울.
  • 柳永益, 「이승만대통령의 업적 재평가」, 『역사학보』192, 2016. 12.

분류:HSS39902 쟁점한국사

#Essay  #한국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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