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전문용어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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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좋은 컴퓨터과학 용어는 개념을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상대의 직관에 호소한다. 이미 서양에서 정립된 단어를 번역하든, 우리가 만들든, 연구 이해와 발전에는 좋은 단어 표현이 필요하다.
본문
90년대에 한미 정상간에 휘호를 교환할 일이 있었다. 큰 길엔 문이 (막힘이) 없다는 사자성어였는데, 우리야 감이 잡혀 있지만, 이를 단순 직역한다면 미국인에겐 꽤 막연했을 것이다. 이때 통역이 번역한 것은 ‘고속도로에는 톨게이트가 없다’로, 이 정도는 되어야 그 문화권에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 우리의 문화인 사자성어는 이렇게 적절한 말로 번역해야 한다는 데는 많이들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이, 서양에서 시작한 컴퓨터과학의 단어들을 한국어로 들여올 때도 우리가 알기 쉬운 말을 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컴퓨터과학 용어는 아무렇게 갖다 붙인 게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상대에게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상대의 직관에 호소한다. 예컨대, 분석의 ‘믿을만함’ (soundness)은 오류 잡아내기에서는 ‘실제 오류 위치를 모두 잡는 것’, 식이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참거짓을 따질 땐 ‘참으로 잡아낸 식이 모두 실제로 참인 것’을 의미한다. 분석과 실제 간의 관계가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믿을만함’이라는 본래 직관이 이를 연결하며, 용어 이름만 외우면 헷갈릴 일이 없다.
그러나 모든 용어가 이렇게 직관적이지는 않다. 예를 들어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object-oriented programming)은 그게 실제로 뭔지 단어만으로 반추할 수 없으며, 따라서 단어를 기호처럼 외워야 한다. ‘커버리지’ (coverage)라는 단어 역시 보험 커버리지나 렌즈 커버리지에 익숙하다면 편한 단어지만, 나는 둘 다 몰랐기 때문에 단어가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개념을 덮이 라고 번역해주는 쉬운전문용어 프로젝트가 나에게는 매우 반갑다.
우리 연구실처럼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는 곳에서는 쉬운전문용어에 기여할 바가 많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단어를 바꿀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재 연구하는 다중 지향성 퍼징은 기존의 지향성 퍼징이 암묵적으로 단일 목표를 전제했던 것을 뒤집었기 때문에, 기존의 지향성 퍼징은 ‘단일 지향성 퍼징’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만약 다중 지향성 퍼징이 새로운 표준이 되면, ‘지향성 퍼징’이라는 단어는 ‘단일 지향성 퍼징’으로 완전히 바뀔 것이다. 용어 재정비가 가져올 혼란을 줄이려면 쉽고 명확한 단어를 만들고, 필요 시 쉬운전문용어에 올려 알려야 한다.
새로운 용어 작업이 외부에서는 제약이나 불편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컴퓨터과학은 아직 용어들이 바뀔 수 없이 굳어 버렸다고 평가할 만큼 오래된 분야가 아니며, 용어를 쉽게 바꿀 시간이 우리에겐 남아 있다. 전문용어 번역과 정리에 많은 노력이 더해지고 있는 지금, 학문의 발전을 도울, 많은 사람에게 통하는 단어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